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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사진/백패킹

비박 / 금학산 대소라치 보개봉 고대산 2015.11.21(토) ~22(일)

비박 / 금학산 대소라치 보개봉 고대산 ◎ 일시 : 2015.11.21(토) ~22(일) ◎ 함께한 이 : 나홀로 ■ 이모저모 7년 전 그러니까 2008년 7월 나홀로 금학산~고대산 종주했던 특별한 추억이 있었던 일로 인해 이번에는 22킬로 경량박배낭을 꾸려 쉬엄쉬엄 다녀왔습니다. 10월 단풍이 있을 때 다녀올려고 했으나 이런저런 일로 단풍잎 다 떨어져버린 황량한 계절에 다녀오게 되었네요.. ↓ 산행 궤적

↓ 고도표 / 다른분 거 퍼와서 올렸습니다.

↓ 한반도산하에서 빌려왔고요..

↓1 동송버스터미널에서 10분정도 걸으면 산행들머리 철원여중고에 도착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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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금학산 종합안내도

↓4 금학산에 대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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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콸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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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매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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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동송읍내 풍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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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금학산 3지점에서 바라본 북쪽 방향

↓14 안내도에는 얼굴바위, 정승바위라고 표기되는데 저는 정승바위에 한표. 코, 턱...머리 위에는 관대를 쓴 것 같습니다.

↓15 금학산 정상 헬기장에 도착했습니다. 파란하늘 같지만 연무가 있고... 낼은 비가 예보되어 풍광을 담기엔 좀 그렇습니다.

↓16 헬기장에서 남쪽으로 100여미터 떨어진 곳에 있으며 실제 금학산 정상은 남쪽으로 100여미터 거리의 군부대 내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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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북방한계선의 철원평야 풍광입니다.

↓20 6.25동란 피아간 격전지였던 이곳 철원평야의 '삽슬봉'엔 많은 포탄이 떨어져 산봉우리가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고 해서 아이스크림고지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21 중앙 높은 산은 지장봉... 연천군에서 지금은 보개산으로 고쳐놨습니다.

↓22 대소라치 이정표 / 대소라치 고개 높이는 해발 547m , 보개봉은 752m 이니까 이곳에서 보개봉 능선까지는 기껏 200여미터인데 생각보다 힘들더군요. 참나무 낙엽이 가득해서 등산로가 잘 눈에 띄지 않지만 서쪽방향으로 가기만하면 되니 ... 길 잃을 일은 없습니다.

↓23 산행들머리 철원여중고에서 100여미터 오르면 '금학정(양궁장)'이 나오고 또 100여미터 더 오르면 체육공원 그리고 30미터 오르면 갈림길... 오름길은 금학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고 , 우측 임도길은 금학산을 우회하는 길이고 이곳 대소라치 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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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보개봉(752m) / 헬기장 갈림길 예전엔 이곳 헬기장이 보개봉으로 불리어졌는데 연천군에서 지장산을 보개산으로 바꾸어버린 이후 이곳은 '헬기장갈림길' 이라고 해놨습니다. 관직박탈 당한 느낌 같습니다.

↓26 금학산 모습

↓27 보개봉 정상 / 헬기장

↓28 진달래 꽃봉오리,, 성질 급한건지? 날씨 탓으로 봐줘야하는 것인지??

↓29 금학산을 넘어 대소라치 고개까지 그리고 보개봉(헬기장갈림길) 능선 오르막은 그다지 가파르지 않지만 지쳐있는 상태라 꽤 힘듭니다. 이후 고대산이 지척인 이곳까지는 가끔은 암릉이 있지만 우회길로 평이하게 올 수 있습니다. '구헬기장'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헬기가 착륙할만한 공간은 없습니다.

↓30 고대산 정상 데크에 도착해서 여정을 풀고..

↓31 해질무렵까지 나를 포함 6동 텐트.쉘터가 자리잡았습니다.

↓32 밤새 세찬바람이 불고... 새벽엔 어느집 텐트가 날아갔는지 난리법석.. 아침에 보니깐 쉘터.텐트 걷고 이미 하산하였더라구요..

↓33 깔끔한 일출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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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일기예보에는 오후 비가 내린다 했지만... 번번히 믿다가 낭패 본 일이 많아서 바람도 불고 새벽엔 서리까지 내린 것으로 보아 비가 내릴 징조로 보고 일찍 철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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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오늘 하산은 2등산로 칼바위능선 쪽으로..

↓38 서남방향 풍광. 어제 보다 오늘은 더 많은 연무가 드리워져 조망은 좋지 않습니다.

↓39 우뚝 솟은 봉우리는 지장봉이고 오른쪽 계곡인 내산리계곡으로 내려가면 대광리가 나옵니다.

↓40 삼각봉에서 고대산 정상을 바라보니 비가 내릴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러나 신탄리역까지 도착해서도 비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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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대광봉

↓46 대광봉에서 바라본 북쪽 방향 풍광입니다. 쾌청한 날씨가 아니어서 좀 그렇네요... 소이산 정상데크에서 보면 선명하게 볼 수 있을텐데.. 소이산 정상데크, 한 번쯤 가서 하루밤을 지내기엔 좋은 곳 입니다. 좋은 시기는...아카시아 질레꽃 만발하는 5월경 그리고 황금벌판을 볼 수 있는 추석전후... 소이산을 가꾸고 돌보는 지역 시문학카페 '모을동비' http://cafe.daum.net/moooz 도 들려보시고요..

↓47 신탄리 마을 전경

↓48 칼바위 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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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신탄리역 열차시간표 / 예전엔 매 시간마다 출발했는데...적자로 인해서 2시간마다 있습니다. 주차장엔 버스도 있으니 열차 시간을 맞추기 어렵다면 버스로...버스에 박배낭 꾸겨넣기 보다는 열차가 좋습니다.

↓54 10차이로 열차를 몬타고... 9시 50분에 내려와서 경춘막국수집으로 가서 아침 대신 막걸리&부침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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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곳에서 퍼온 자료입니다. 궁예는 처음 기훤·양길 등 지방 호족 수하에 머무르다가 명주(溟州·강릉) 일대의 영동지방을 장악하면서 점차 세력을 키워 나갔다. 스스로 정한 선종(善宗)이라는 불교 법호를 가진 궁예는 강원도 일대의 사찰에 기거하던 수원승도(隨院僧徒)들을 자신의 정치·군사적 추종자로 삼는 한편 미륵신앙을 통해 당시의 신라 사회를 개혁, 새로운 이상세계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3500여 명의 군사력을 확보하고 스스로 장군이라고 칭하게 된 궁예는 영서지방을 거쳐 서쪽으로 금성(김화)과 철원 일대로 진출,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했다. 특히 왕륭(王隆 : 왕건의 부친) 등을 규합해 황해도·강원도·경기도 일대를 장악하게 된 궁예는 899년 송악을 도읍으로 정하고 이곳에서 901년 후고구려를 건국했다. 한반도 전체를 통합하려는 야망을 가진 궁예는 904년 국호를 대동방국을 뜻하는 마진(摩震)으로 바꾸고 905년 새로운 도읍지로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심지인 철원평야의 풍천원을 택해 천도하게 됐다. 궁예는 이곳에서 독자적인 중앙집권체제를 수립하고 901년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다시 바꾸면서 스스로 미륵불로 자처하며 이상세계 건설을 위해 불교적 신정정치(神政政治)를 추구했다. 그러나 백성들이 조화를 이루는 이상세계 건설이 궁예의 꿈이었다 해도 그의 엄격한 신정정치는 많은 토착 호족세력들의 포섭과 융화를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궁예는 왕건을 중심으로 하는 호족과의 대결에서 패배해 역사의 패자가 되고 아울러 기록에 악인으로 남게 됐다. 호족 출신도 아니면서 한때 한반도의 3분의 2를 통합하고 이념상으로나 통치체제에 있어서도 가장 강력하고 미래지향적인 독자적 국가를 건설했지만 궁예는 역사에서 정신병자 정도로 폄하돼 왔다. 그러나 얼마 남지 않은 왜곡된 사료 속에서도 ‘궁예는 사사로움 없이 사졸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 해 많은 사람이 마음으로부터 공경해 일찍이 장군으로 추대했다’라는 기록이나 ‘비겁한 자의 친구가 되기보다 정직한 자의 원수가 되는 편이 더 낫다. 독사와 전갈은 피할 수 있어도 비겁한 인간은 피할 수 없다’라는 기록 등은 인간 궁예의 진면목을 보여 주고 있다. 비록 궁예는 몰락했지만 궁예의 이상과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의 통치체제 건설 및 자주적이고 개혁적인 정치적 이념은 왕건을 통해 고려로 계승됐다. 한반도는 물론 고구려가 지배했던 만주 일대를 포함하는 대동방제국을 건설하려는 웅지를 실현하기 위해 궁예는 철원 북방 30리 지역의 풍천원에 새로운 도읍을 정하고 둘레 12.5㎞의 웅장한 도성을 쌓았다. 한성백제의 풍납토성의 둘레가 3.5㎞, 신라의 경주월성이 1.8㎞, 고구려의 국내성이 2.7㎞인 점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대규모 도성이었다. 이 태봉국 도성의 위치는 조선시대의 기록과 최근의 항공사진 및 군사지도, 그리고 실제의 현장조사 결과 등을 종합해 볼 때 철원군 월정리 북쪽의 비무장지대임이 확인됐다.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조사단은 1996년 문헌 자료를 중심으로 해 태봉국 도성을 조사한 바 있으며 필자는 2001년 4차에 걸쳐 비무장지대에 들어가 궁예 도성을 다시 직접 조사한 바 있다. 내성과 외성의 이중으로 구성된 이 도성은 둘 다 남북으로 긴 사각형 형태를 하고 있으며 도성의 북쪽이 9.5도 정도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성의 둘레는 외성이 12.5㎞, 내성이 7.7㎞로 모두 흙으로 축조됐으나 저지대와 일부 지역에서는 현무암을 사용했다. 성의 형태는 기록상 외성의 경우 성 하단 폭 10.9m, 높이 3.6m로 돼 있으나 실제로는 폭 6~7m, 높이 2m 정도였고 내성은 하단 폭 3.6m, 높이 2.1m로 돼 있으나 실제 남아 있는 성의 크기는 기록보다 0.5~1m 정도 더 작다. 내성 북쪽에는 태봉국의 궁궐이었던 포정전(布政殿) 주위를 둘러싼 둘레 1.8㎞ 정도의 궁성과 그 앞에 석등(해방전·국보 제118호)의 위치가 지도상에 나타나 있으나 지금은 북한지역이라 확인이 불가능했다. 또 외성 남벽의 동쪽에도 남대문지(南大門址)와 그 문 앞에 궁예시대 석탑이 있는 것으로 지도상에 명기돼 있으나 미확인 지뢰지대여서 확인이 어려웠다. 외성의 동쪽 지역에는 일제시대 부설한 경원선이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는데 철도는 제거됐으나 철도 제방은 거의 원형대로 남아 있다. 비무장지대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이 태봉국 도성은 그 외성의 남벽과 북벽이 남북방 한계선에 나란히 인접해 있으며 군사분계선이 이 도성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도성을 남북으로 양분하고 있다.그리하여 이 태봉국 도성지의 조사와 연구는 남북 어느 한쪽의 노력만으로는 어렵고 남북이 뜻을 합해야만 가능한 실정이다. 이것은 1000년 이상 방치해 온 귀중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을 이제 우리 민족이 힘을 합해 조사·발굴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말해 주는 것이며 이러한 노력을 통해 남북은 우리 민족과 민족문화의 동질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역사의 요구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재 육군사관학교 사학과 교수·前 육군박물관장 〉 < 출처 : 국방일보=밀리터리 리뷰, 2004. 3. 18>

출처 : 개척인의 쉼터 (어이 친구야~ 막걸리 한 병 들고 산에나 가자)
글쓴이 : 촌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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